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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실천하기

내가 나에게 나를 소개합니다.

by 자낳괴나돈조심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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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돈을 좋아했다. 90년 대생들은 공감하겠지만 돈을 좋아하면 속물이다라는 시선과 함께 돈을 멀리해야 하는 물질로 인식되는 사회시대에서 자라왔다. 

다행히 나는 돈은 무서운 것이니 멀리해라 라는 교육보단 어렸을 때부터 돈을 좇지 말라 네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먼저 찾아라 그러면 돈은 따라온다 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청소년 시절엔 공부가 싫어 열심히 하지 않았다. 손재주가 좋아 손으로 하는 학과를 가자 싶어 수시로 전문대 주얼리 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다행히 재미를 느꼈다. 세공을 하고 내가 직접 주얼리를 만든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꽤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하여 바로 종로 귀금속 회사에 취업했다. 그때당시에 3D캐드 작업으로 주얼리 원본을 만드는 분야가 비전이 있었다. 학원을 다니며 공부해 바로 취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성취감을 느꼈던 부분은 직접 세공을 하고 하나의 주얼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취업 후 내가 하는 것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로 주얼리를 그리는 것뿐이었다. 

용인에서 종로까지 출퇴근도 만만치 않았다. 지옥버스를 타고 다니며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렸고 앉지 못했다. 환경도 열악했다. 옛날에 지어진 건물로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고 주변에 노숙자도 많았다. 2년간 버티며 내 몸은 망가져 갔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턱관절에 문제가 생겨 입이 벌어지지 않았고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정말 깊은 마음속에 있는 하고 싶은 일을 뭘까 

외국 생활이었다. 공부도 잘하지 않고 재주도 없는 내가 어떻게 외국을 갈까?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자라고 생각했다. 지인도 연고도 없는 외국에 간다는 것에 두렵기도 했지만 마음은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워킹 홀리데이의 자본금을 모으기 위해 돈을 많이 주는 일인 케리비안베이에 라이프가드로 알바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몸은 정말 힘들었다. 체력적으로 굉장히 고된 일이지만 함께하는 동료들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은 거의 체대생이었는데 에너지가 정말 좋았다. 함께 운동하며 행복했고 다시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운동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5개월간의 즐거운 알바생활을 마치고 호주로 떠났다. 즐거웠다. 청소를 해도 기뻤다. 따듯한 날씨 친절한 사람들 예쁜 하늘.. 더 있고 싶어 세컨드비자를 얻기 위해 소 공장에 들어갔다. 와 이때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대형 냉장고 같은 추운 공장 안에서 25kg가 넘는 통을 옮기고 소를 포장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손가락이 부어서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이때도 울면서 다닌 기억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세컨드비자를 따기 위해 3개월만 참자 싶어 꾹 버티고 참았다. 이때도 동료들 덕분에 버틴 것 같다. 세컨드비자가 나오는 날 바로 그만두고 초밥집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의인을 만났다. 사장님 부부는 어릴 때 호주로 이민온 한인 시민권자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항상 남을 베려하고 희생하고 이타심이 강한 분들이셨다. 지금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giver였다. 참 많은 영감을 주신 분들이다. 본받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다. 저런 마음가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기독교인가? 해서 교회를 나가보기도 했다. 너무나 좋지만 영원히 초밥집을 다닐 수 없는 법! 나도 한국에서 다시 하고 싶은 일이 생겨 헬스트레이너가 되야겠다 마음먹으며 8개월 정도 후 귀국했다. 그분들께 좀 더 감사를 표하고 나올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후에 한국에 오신다길래 만나기로 했지만 사장님이 몸이 안 좋아 결국 만나지 못하고 아쉽게도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연락이 멀어지게 됐다.

 

귀국 후 바로 어떻게 하면 헬스트레이너가 될 수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체대생도 아닌 초보를 구인하는 곳은 별로 없었고 한 아파트에 있는 헬스장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거기에 있는 매니저님에게 기초적인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를 배우고 운동의 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호텔신라에서 구인광고를 보게 됐다. 그때 호텔신라에서 생활레저사업을 하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먼저 아르바이트로 취업했는데 아르바이트생에게도 5일간 교육을 진행했다. 큰 기업은 교육도 제대로 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강연을 해주셨다. 이때 나와 비슷한 친구를 만났는데 굉장히 진취적이고 행동력 있는 친구라 대화도 잘 통하고 배울 점도 많았다. 무엇이든 성실하게 임하니 계약직도 할 수 있었고 정규직까지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삼성계열처럼 서류> 필기> 면접> 임원면접이라는 과정을 거쳤는데 결과적으론 3번 만에 합격할 수 있었다. 간절한 만큼 이 과정들을 거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두 번째엔 서류에서 떨어졌는데 어이가 없기도 하고 허무했다. 3번째엔 이번에 안되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생각했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합격목걸이가 주어졌다. 너무 기뻤다. 대기업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 인생에서 호텔신라라는 대기업에 입사하다니 이런 복지들을 누릴 수 있다니 감사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래 다니진 말아야지 라는 마음도 있었다. 자기 계발에 집중할 수 있는 회사라 너무 좋았다. 하지만 2~3년이 지나면서 호텔신라라는 백그라운드의 만족감과 소속감과 적은 월급에 중독이 되며 고인 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1년에 자격증 1개는 따자라는 목표는 이루면서도 항상 목이 말랐다. 그러던 중 코로나로 인해 유급휴직에 들어갔다. 남는 시간이 많아 책을 많이 읽게 됐는데 책이 나에게 성장이라는 계기를 다시 일깨워 주었다. 항상 뭐가 돼야지 뭘 해야지라는 목표만 세웠는데 이루고 나면 성취감이 들어도 유통기한이 있고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성장을 목표로 하니 추진력을 잃지도 않고 더 낙관적이며 행동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성장? 어느 분야에서? 장기적으로 볼 땐 돈의 성장이 필요했다. 월급으론 부족했다. 책을 읽어보니 사업이나 투자를 하란다. 사업을 하고 싶었고 비건도시락을 아이템으로 정했다. 워홀 경험이 생각났다. 이민의 나라 호주에서는 각국의 음식들이 대중적으로 비건화 되어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호주로 벤치마킹을 떠났다. 결과적으론 실패하고 1주일 만에 돌아왔다. 집 사기도 당했을 때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갔고 호주에서 먹은 비건음식들은 오히려 한국이 더 맛있었다. 부족한 시장조사와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 탓이다. 패잔병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k-startup에 내 사업계획서를 지원했다. 하지만 모두 떨어졌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계속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던 중 김작가tv에서 JB님을 만났다.

 

내 인생의 두번째 터닝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다. JB님은 확실히 달랐다. 유튜브에서도 엄청난 인사이트를 보여줬다. 마음속 깊이 있던 주식 단기로 나도 하고 싶은데..라는 나의 욕망을 끌어올렸다. 바로 카페에 가입하고 초급, 중급을 듣고 5번 복습했다. 거금을 들여 고급과정까지 마쳤다.

정말 사람은 천재다. 하라는대로만 하면 부자가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소개서도 쓰고 있다. 이제는 주식이 나의 본질이 있도록 나만 노력하면 된다. JB님을 만날 있음에 감사하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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